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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역사 51편 화폐의 발달 과정 서양 중세사13

by cellife 2024.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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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역사 51편  바르바리해적 서양 중세사13

 

대항해 시대(15세기 후반 ~ 17세기)는 유럽 국가들이 대서양과 인도양,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로의 탐험과 식민지 확장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를 의미한다.  이 시기는 여러 가지 이유로 특징지어다. 이 시기에 유럽의 탐험가들은 새로운 항로를 찾고, 미지의 땅을 발견하기 위해 대항해에 나섰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바스코 다 가마, 페르디난드 마젤란 등 여러 유명한 탐험가들이 이 시기에 활동했다. 항해 시대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간의 무역을 활성화시켰다. 특히 향신료, 비단, 금, 은과 같은 귀중한 자원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무역로가 확장되었다. 유럽 국가들은 새로운 땅을 발견한 후, 이를 식민지로 삼아 자원을 착취하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등 여러 국가가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 식민지를 세웠다. 대항해 시대 동안 해양 강국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초기의 주요 강국이었으나, 이후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도 해양 세력으로 부상했다.

 

대항해 시대는 바르바리 해적의 출현도 출연하게 되었다. 이들은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안에서 활동하며, 유럽의 상선과 항구를 공격하였다. 대항해 시대의 무역 확대는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더 많은 목표와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해적 활동이 활발해졌다.

 

바르바리 해적의 등장은 여러 역사적 배경에 기인다. 십자군 전쟁이 1303년에 끝난 후, 아랍인과 바르바리 해적은 기독교도들과의 해상 전투를 계속했다. 이들은 ‘신앙심이 없는 자’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며, 이슬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민족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권리이자 의무로 여겼다.

 

바르바리 해적의 발호는 북아프리카의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항상 궁핍했다. 사막으로 둘러싸인 지역에서 생존을 위해 해상 무역이 필수적이었지만, 이를 위한 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에 해적질을 통해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 이렇게 얻은 전리품은 생존에 필수적이었고, 포로를 노예로 삼거나 몸값을 요구하는 방법으로도 활용되었다.

 

1492년, 스페인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한 사건은 바르바리 해적의 활동을 더욱 촉진했다. 무어인들은 자신의 고향을 잃고 북아프리카로 쫓겨나면서, 기독교인과 그들의 선박을 대상으로 복수를 다짐하며 ‘지하드(성전)’를 시작했다. 이는 바르바리 해적이 지중해와 대서양의 해적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었다.

 

바르바리 해적은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를 지배한 후, 지중해를 넘어 이탈리아와 남부 유럽을 약탈했던 사라센 해적의 후손이다. 사라센 해적은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활발히 활동했으며, 그 후 몇 세기가 지나 바르바리 해적이 북아프리카 연안에서 등장하게 되었다.

 

바르바리 해적은 규모와 악행 면에서 사라센 해적을 능가하며, 이슬람의 색채가 더욱 짙어졌고 활동 범위도 지중해를 넘어 대양으로 확대되었다. 사라센 해적이 중세 지중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면, 바르바리 해적은 근세 대항해 시대에 들어서 먼 대양까지 진출해 약탈을 일삼는 해적이 되었다.

 

 

바르바리 해적의 영업력

 

바르바리 해적은 17세기부터 갤리선 대신 범선을 활용하여 지중해를 넘어 대양으로 진출했다. 갤리선은 노잡이가 힘으로 항해하는 방식으로, 물살이 잔잔한 지중해에서만 적합했지만, 범선의 도입으로 대서양의 높은 파도와 거친 해류를 견딜 수 있게 되었다. 범선은 대양 항해에 적합하며, 측면대포를 장착하여 무력이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바르바리 해적의 활동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고, 그들은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프랑스, 잉글랜드는 물론 북극권의 아이슬란드와 덴마크 해안까지 공격하여 주민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 바르바리 해적의 공격을 받은 유럽 해안 지역은 거의 예외 없이 '라치아(Razzias)'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공격을 받았으며, 수천 척의 선박이 이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피해를 입은 해안가 주민들은 안전한 내륙으로 피신해야 할 정도로 바르바리 해적의 피해가 심각했다.

 

유럽의 기독교도들에게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적, 즉 바르바리 해적은 배를 약탈하고 마을을 파괴하는 존재로, 말 그대로 재앙과 같은 존재였다. 반면, 몰타에 자리 잡은 십자군 기사단은 이슬람의 배를 발견하는 즉시 약탈하는 활동을 벌였고, 프랑스에서는 사략 면허를 받은 합법적인 해적들이 활발히 활동했다. 지중해에서는 다양한 해적들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훗날 세계의 패권을 쥐게 되는 유럽인들이 '커세어'라는 용어로 부르며 증오를 담아 언급했던 해적들은 대부분 북아프리카의 해적들이었다. 이로 인해 바르바리 해적은 커세어의 대표적인 예로 여겨지게 되었다.

 

북아프리카 해적선은 두 개의 사각형 메인 돛대와 사다리꼴 보조 돛을 가진 전형적인 브릭(Brig) 선으로, 해적 활동에 최적화된 배였다. 브릭은 필요 인원이 적고 빠른 스쿠너(Schooner)와 슬루프(Sloop)보다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어 상선과의 싸움에서 유리했다. 그러나 18세기 말, 북아프리카 해적들은 상대방이 일정 수 이상의 고급 유닛을 모으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바르바리 해적의 수익 원천

  1. 약탈: 바르바리 해적은 상선과 상업 선박을 공격하여 화물과 재물을 약탈했다. 이들은 주로 귀금속, 향신료, 섬유, 식료품 등을 노렸다.
  2. 인질 잡기: 해적들은 유럽의 선원과 여행객을 납치하여 인질로 삼고, 이들을 통해 몸값을 요구했다. 이러한 인질은 종종 높은 몸값으로 거래되었고, 해적들에게 큰 수익을 안겼다.
  3. 무역과 협상: 바르바리 해적들은 때때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특정 국가와 비공식적인 무역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들은 유럽 국가와의 협상에서 인질을 교환하거나, 자국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무역을 진행했다.
  4. 국가의 지원: 일부 바르바리 해적은 북아프리카의 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해적 활동을 통해 얻은 수익의 일부를 국가에 바치고, 그 대가로 보호를 받거나 다른 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바르바리 해적단은 1500년경에 형성되었으며, 이 시기에 이슬람 세력이 에스파냐 반도를 포함한 유럽 지역에서 축소되고 있었다. 에스파냐에서는 이슬람 지배세력과 이슬람계 주민들이 대규모로 추방되었고, 많은 이들이 해적이 되어 오스만 제국의 지원 아래 유럽 해양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들은 '바르바리 해적단'으로 알려지며, 300년 이상 유럽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무차별적인 노예사냥을 벌였으며, 이들은 주로 약탈 지역 주민을 납치해 노예시장에 판매했다. 특히 백인 여성을 선호했으며, 이슬람 여성도 돈이 되는 상품으로 간주되어 납치 대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바르바로사 형제는 이탈리아 나폴리를 공격해 4000명을 포로로 잡았고, 추가로 리파리 섬에서 9000명을 더 포획했다. 또 다른 해적 투르구트는 1551년 몰타 제도 고조 섬에서 6000명을 잡아 팔았다.

바르바리 해적단은 유럽인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았고, 잡힌 사람들 중에는 백수십만 명이 포함되었지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은 10만 명에 불과했다. 포로들은 몸값을 지급하면 풀려났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노예로 팔리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구호기사단'이나 '구출기사단'이 등장하여, 재정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며 구출하는 활동을 했다. 몸값이 없는 사람들은 결국 노예 생활을 지속해야 했다.

 

1554년에는 이탈리아 비스테에서 7000명, 1558년에는 메노르카에서 3000명을 포로로 잡아 이스탄불로 끌고 갔다. 바르바리 해적들은 심지어 1627년에는 아이슬란드까지 진출해 레이캬비크를 약탈하고 400명을 노예로 납치했다. 이러한 노예사냥은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이루어졌으며, 누구든지 해적의 납치 대상이 되었다.

 

납치된 사람들은 해적선의 노잡이로 팔리거나, 백인 여성은 하렘에 갇히는 운명을 맞았다. 150만 명이 모로코와 알제리로 끌려갔으며, 알제리의 노예시장은 16세기 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거래 장소로 알려져 있다. 당시 알제의 감옥에는 2만 명의 포로가 상시 수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바르바리 해적단의 영향력은 19세기 초 세계 정세의 변화와 함께 종식되었다.

 

 

오스만 동맹

바르바리 해적은 스페인 함대의 침입으로 근거지를 잃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 동맹을 요청했다. 이를 기회로 삼은 셀림 칸 1세는 1529년 알제에 군대를 파병하여 스페인인을 쫓아냈다. 1533년에는 해적 바르바로사를 오스만 제국 해군의 총제독으로 임명하여, 그가 이끄는 함대는 5년 후 동부 지중해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했다. 이후 33년 동안 동부 지중해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바르바리 해적은 알제, 튀니스, 트리폴리 등의 지방 영주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해적들은 영주들에게 은신처와 약탈물 거래를 제공했다. 대신, 해적의 노획물에서 얻는 이익의 일정 비율을 영주가 요구했다. 이 거래는 영주들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유럽 열강은 해적의 피해를 입으면서도 유화책을 택했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은 내전과 종교전쟁으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해적 퇴치에 집중할 수 없었다. 대신, 이슬람 국가와 상업적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자국민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소규모 국가의 선박들이 해적의 주요 먹잇감이 되었다.

 

또한, 유럽 열강은 경쟁국의 선박을 공격하기 위해 바르바리 해적을 활용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스페인을 공격하기 위해 해적을 이용했고,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도 자신의 외교정책에 해적을 포함시켰다. 비록 해적을 진압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해적의 활동을 저지하려 하지 않았고, 강력한 선제공격은 거의 없었다.

 

 

 

바르바리 제국의 해적 시작으로 오스만 함대 제독되다.

 

Khayr ad-Dīn이며, '붉은 수염'이라는 뜻의 Khiḍr로 알려진 그는  성장한 인물이다. 1546년까지 활동하며 지중해 해적 활동한 사람으로  1546년까지 활동하며 지중해 해적 활동과 군사 작전을 통해 두각을 나타냈다 히드르와 그의 형 아루지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북아프리카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대한 증오를 바탕으로 해적 활동을 시작했다. 아루지가 1518년 스페인에게 사망하자, 히드르는 하이르 앗 딘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오스만 술탄에게 충성을 서약하여 군사 지원을 받았다. 그는 1529년 알제를 점령하고 이를 해적 활동의 본거지로 삼았다. 1533년 오스만 제국의 총제독이 된 후, 그는 튀니지를 정복하여 오스만에 바쳤고, 튀니스는 해적 활동의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가 1535년 튀니스를 점령했으나, 바르바로사는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카를 5세의 함대를 격파하며 동부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강화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되며 생을 마감했다.

 

 

 

해적 퇴치 연합군 결성

미국은 1700년대 후반 북아프리카의 해적들로부터 자국 선박과 선원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료를 지불했다. 그러나 해적의 공격이 계속되자, 1794년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해군 창설 법안에 서명하고 6척의 호위함을 건조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이 독립하기 전, 13개 식민지의 선박은 영국 국적선으로 인정받아 해적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지만, 독립 이후에는 바르바리 해적들이 미국 선박을 무시하고 납치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재정이 열악한 상태였고, 1796년 트리폴리 조약을 체결하여 바르바리 세력과의 우호 관계를 맺었지만, 해적들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공격했다.

 

이어서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해적에 대한 강경 대응을 선택하여, 1801년부터 1805년까지 트리폴리 전쟁을 벌였다. 미국은 해적의 요구를 거부하고 군사 작전을 통해 해적 소탕에 나섰으며, 이 과정에서 해전 경험을 쌓았다. 이후 1812년 영국과의 전쟁 중에도 해적과의 전투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1815년 다시 지중해에서 해적을 물리치고 그들과 조약을 체결했다. 이러한 미국의 강경한 대응은 유럽 열강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들은 미국의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해적 대응 방식에 대한 재고를 하게 되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은 해군 창설과 군비 증강을 추진하게 되었고, 1801년 5월 14일에는 트리폴리의 파샤 유수프 카라만르가 미국 영사관의 성조기를 베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미국의 분노를 촉발시켰고, 6월 1일 미 해군 함대가 지중해로 진입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미 해군은 트리폴리를 공격하기보다는 해상 봉쇄에 집중했으며, 1803년에는 전함 7척을 동원하여 봉쇄 작전을 강화했다. 1805년, 윌리엄 이튼 장군이 이끄는 미 해병대와 현지 용병이 리비아의 다르나를 공격했으며, 이 전투에서 미군은 35명이 전사하고 64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바르바리 해적 측은 800명이 사망하고 1200명이 부상을 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는 미국의 해적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상징하며, 이후 미국의 해양 안전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아프리카 식민지화를 본격화했다. 이로 인해 해적들은 공포에 휩싸여 즉각 항복을 선언했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132년간 통치하며 1865년 이후 바르바리 해안 전체를 합병했다. 이후 유럽 제국들이 바르바리 해안으로 진출하면서 바르바리 해적의 활동은 마침내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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