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역사2 - 서양 중세사6
고대 로마 시대부터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미쳤던 유럽 여러 지역에 거주해 왔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확립된 이후, 유대인들은 관용의 대상으로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 지위는 로마 제국이 분열한 이후에도 비잔티움 제국과 서로마 제국 양쪽에서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카를 대제의 보호 아래, 유대교 상인들은 동방 무역에서 활약하며, 통상과 무역뿐만 아니라 농업과 수공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황제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다. 비록 기독교의 반유대주의가 존재했지만, 오토 왕조와 잘리에르 왕조 시기에도 이러한 보호 체계는 지속되었다. 유대교도들은 프랑크 왕국의 권력 기관에서도 일하는 등 중세 초기(8~10세기)에는 유대교도와 가톨릭교도가 공존하는 관계에 있었다.
1096년 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면서, 십자군들은 신앙의 적을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황제의 유대인 보호 체제가 무너졌다. 십자군의 종교적 열정은 이교도와 유대교도에 대한 박해를 초래했고, 유대교도들은 '개종하지 않는 이단'으로 간주되어 유럽 여러 지역에서 박해를 받게 되었다. 루앙, 마인츠, 보름스, 쾰른, 프라하와 같은 대규모 유대 공동체가 있는 도시에서는 처음으로 유대인 학살이 발생했다. 이후 2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는 1146년 프랑스와 3차 십자군 원정이 있었던 1189/1190년 잉글랜드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이어졌다. 하인리히 4세는 유대교도를 보호하는 법령을 내렸지만, 대신 그들에게 특별한 세금을 부과했다. 이러한 조치는 13세기에는 신성로마제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기독교와 이슬람 두 국가 모두 유대인들에게 주요 적이 아니었으며, 때때로 친구가 되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정당한 통치 세력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이는 종교적 이유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보호받기 위해 통치자에게 의존하는 소수 집단이었다. 1127~1131년에 작성된 게니자 문서에는 유대인들이 이슬람 통치자들을 위해 정례 공적 기도를 낭독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는 200년 후 유대교 기도서에 수록되었다. 당시 모슬렘 자료와 달리 게니자 문서에는 당국에 대한 비판이 없었다. 통치자들도 이에 부응하여 유대인들의 안전을 보장했다. 그러나 종교적 열광주의가 강해지면 유대인들은 고난을 겪기도 했다.
교황청은 유대인에 대한 개종 강요나 적개심을 자제하라고 권고했지만, 기독교 통치자들은 이슬람 통치자들이 제공했던 최소한의 법적 관용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로 인해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심화되었고, 이는 대중의 반유대주의적 감정을 정당화했다. 또한, 십자군 전쟁은 유대 공동체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고, 유대인들은 모슬렘과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소문으로 인해 더욱 큰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1215년 제4회 라테란 종교회의에서 유대교도에 대한 차별이 본격화되었다. 그들은 특정한 복장을 착용하고 노란 천을 몸에 달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기독교도와 함께 앉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규정은 즉시 시행되지 않았으나, 유대교도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길드에서 배제되고 농지를 소유할 수 없게 되면서, 그들은 결국 교회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사채나 외환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약 600년 동안 이슬람교의 관용 속에서 창조적인 미래를 꿈꾸며 살아왔다. 반면,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지배 아래에서 유럽의 암흑 시대를 겪었다. 라테란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는 반유대주의를 제도화하며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표식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라틴계 국가에서는 유대인에게 황색 별 모양의 배지를 부착하게 했고, 독일에서는 독특한 모자를 착용하게 했다.
1348년부터 1350년 사이에 발생한 흑사병은 유대인들에게 최악의 상황을 초래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넣어 역병을 일으켰다는 터무니없는 비난을 퍼뜨렸고, 이는 대규모 테러와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건들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지에서 유대인 추방령으로 이어졌다. 기독교화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도 유대인들은 이전의 이슬람 지배 하에서와 같은 관용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페르디난드가 무어족을 축출한 후 유대인들에게 개종과 세례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한 자는 추방당하거나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는 1492년 스페인 추방령으로 culminated 되었고, 포르투갈 역시 유대인들을 대규모로 추방했다.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주로 네덜란드와 독일로 이주하게 되었다.
기독교 세계에서는 개종한 유대인들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개종자들은 지식계층 내에서 비판적이고 탐색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으며, 교회는 15세기 보헤미아의 알비주아파 운동이나 존 후스 운동에서 유대인들의 영향력을 감지했다. 이는 결코 잘못된 판단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중세 교회의 독점을 깨뜨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중심에서 활동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지적인 면에서 파괴적인 요소로 작용했으며, 중세 유대인들에 대한 비난은 대개 과장된 것이었지만, 그들이 지식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유대교 역사적 관점에서 서구 기독교의 역사는 어둡고 모순된 범죄행위로 얼룩져 있다. 기독교 교회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속 왜곡된 유대인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범죄를 희석화하려 했지만, 이는 진실을 감추려는 위선에 불과하다. 유대인의 직업을 제한하고, 그들에게 수치스럽게 여기는 직업을 강요한 주체는 바로 기독교 교회였다. 교회와 국가는 유대인 박해를 사주하거나 묵인하며 국민들이 유대인에게 졌던 부채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공했다. 이후 다시 유대인들이 금융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중세 유대인들은 기독교도로부터 격리되어 차츰 게토 제도 아래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아랍 세계에서 유대인의 동서양 무역
세파르딤 유대인
중세 초 유대인들은 극심한 고난을 겪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에도 팔레스티나와 알렉산드리아에서 간신히 생존하던 유대인들은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탄압으로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추방당하는 위기를 맞았다. 또한, 동로마 제국이 페르시아와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벌이던 시기, 많은 유대인들이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 생명을 잃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도망갈 곳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8세기경, 이베리아반도가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무슬림에 의해 정복되면서 후우마이야 왕조가 세워졌고, 이 지역의 사회 구조가 변모했다. 무슬림들은 기독교 농민들을 통치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이민을 장려했으며, 유대인들은 무슬림 지주와 기독교 농민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기회를 통해 많은 유대인들이 동로마 제국을 떠나 이베리아반도로 이주하였고, 이들은 아슈케나짐 유대인의 기원 중 하나가 되었다.
결국, 중세 이베리아반도는 무슬림 군인, 기독교 농민, 그리고 두 세력 사이에서 중개인의 역할을 하는 유대인으로 구성된 복합적인 사회로 발전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안달루시아에 정착한 라디노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은 세파르드 유대인의 기초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후우마이야 왕조의 주요 도시들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번창하면서 코르도바, 세비야, 톨레도와 같은 도시들은 중세 유럽의 주요 대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아랍 세계에서 유대인들은 주로 무역업에 종사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8세기부터 11세기 초까지 이슬람은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국제 경제 체제를 확립하였고,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연락망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이슬람 기록과 유대인의 답장(responsa)에서 유대인 상인들이 인도와 중국에서 최고의 사치품을 거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0세기부터 특히 바그다드의 유대인들은 은행가로서 모슬렘 왕실에 봉사하며, 유대인 무역업자들로부터 모은 자금을 칼리프에게 대출하는 방식으로 은행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투델라의 베냐민에 따르면, 1170년 바그다드에는 4만 명의 유대인이 28개의 회당과 10개의 예쉬바(랍비 학교) 등을 세우며 번영을 누렸다.
유대 상인들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 중국 등 여러 나라와의 무역에서 다양한 언어—그리스어, 스페인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슬라브어 등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들은 각 지역의 상업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많은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10세기 전후로 노예무역이 줄어들면서 유대인의 중국 방문은 감소했지만, '몽골의 평화기(1250~1350년)'에는 다시 유대 상인들이 중국에서 활발히 활동하게 되었다.
괴테인(S. D. Goitein)은 게니자 문서를 통해 11~12세기 사회와 마이모니데스의 사상적 배경을 복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카이로 게니자에 보관된 상업용 서신을 보면, 마이모니데스의 동생인 다윗을 포함한 이집트의 유대인들이 먼 곳까지 무역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염료, 직물, 약제, 보석, 금속, 향수 등을 거래했다. 그들이 주로 활동하던 지역은 이집트, 팔레스타인 해안, 시리아 다메섹 등이었다. 푸스타트의 거상 모세 벤 야곱은 말린 과일, 종이, 기름, 식물, 동전 등을 거래하며 '교환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마이모니데스의 아들 아브라함이 수마트라에서 거래하던 중 사망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유대인 상인들이 말레이시아와도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11세기 유대인 상인 요셉 이븐 아칼은 180개의 꾸러미를 한 번에 선적하고, 바빌론의 큰 대학의 공식 대리인으로 활동하며 유대인 세계에 대학의 규정을 전파했다. 그는 인도 제국 내의 작은 유대인 공동체와도 교류했다고 한다.
이슬람의 제도
622년 이슬람이 등장한 이후, 예언자 무함마드와 그의 후계자 칼리프들은 신속하게 세력을 확장하여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에 걸쳐 넓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 제국은 정복된 지역의 체제와 문화를 흡수하고 동화했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비무슬림 피정복민에 대해 관용적인 정책인 ‘딤미’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는 비무슬림이 정해진 세금만 부담하면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이었다.
구스타프 루본은 무슬림 칼리프들이 피정복민에게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며, 이전 통치자들보다 낮은 세금을 부과했다고 설명한다. 이슬람이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 꾸란의 가르침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자비와 정의를 베풀 것을 강조하고, 다양성과 조화가 이슬람의 본질적 핵심이라고 한다. 그는 이슬람의 관용적인 전통이 ‘딤미’ 제도를 정착시켰고, 이는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 제도로 이어졌다고 본다.
이슬람 세계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였다고 강조한다. 특히 ‘성서의 백성’인 유대인과 기독교인에 대한 평등한 대우가 요구되었다. 이처럼 이슬람 사회는 소수 민족의 지위를 인정하고 다원주의적인 공존에 익숙한 사회 구조를 형성했다.
이교도에 대한 관용은 이슬람 이전에도 존재했으며, 아랍 부족들 사이에는 이방인을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하는 전통이 있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디나로 이주한 후, 유대인과 보호 계약을 맺고 그들을 보호한 사례도 있다. 이러한 전통이 이슬람 세계가 확장되면서 비무슬림(유대인, 기독교인, 조로아스터교인 등)에게 적용되었다. 이슬람 국가에서 딤미는 이슬람 지배자와의 계약을 통해 생겨났으며, 계약 조건은 ‘지즈야(jizya)’라는 인두세를 납부하는 것이다.
국가는 딤미에게 생명과 재산의 안전, 외적 침입으로부터의 보호, 신앙의 자유, 그리고 광범위한 내적 자치를 보장했다.지즈야를 지불한 비무슬림은 종교를 유지하고, 종교 의식을 행하며 예배 장소를 보존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또한, 비무슬림은 결혼과 이혼 등 개인적인 문제에서 그들의 종교 규범에 따라 생활할 수 있었다. 형사처벌의 대상은 절도나 강간에 한정되었으며, 무슬림에게 금지된 음주와 돼지고기 섭취는 비무슬림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딤미’는 지즈야를 납부한 조건으로 이슬람법의 적용을 받지 않았으며, 자카트와 성전에서 면제되었다. 지즈야는 기본적으로 비무슬림이 부담해야 할 세금이었지만, 노인, 여성, 정신적 장애인, 병자, 거지는 면제되었다. 자카트는 무슬림의 의무로서 성인 남성이 1년 소득의 2.5%를 납부해야 했으며, 이는 고아와 가난한 자 등을 위한 사회보장제도의 일환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자카트의 수혜 대상에 비무슬림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이슬람법은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구별하지 않고, 직업을 가질 수 없는 무능력자를 보호할 의무를 통치자에게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의무를 소홀히 한 통치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여겨졌다.
이슬람 국가에서 딤미 직위를 얻은 유대인의 생활
딤미는 이슬람 사회에서 노예보다는 높은 지위를 가졌지만, 자유 무슬림보다는 낮은 위치에 있었다. 일부 딤미는 부와 권력을 누리기도 했으며, 역사적으로 비무슬림의 지위는 법적으로 규정된 것보다 나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비무슬림에 대한 제한이 강화되는 경우도 있었고, 이는 딤미의 사회적, 정치적 진출이 과도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수니 통치 아래에서 딤미는 더 나은 대우를 받았고, 정부 업무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맡았다. 반발이 크지 않았지만, 드물게 기독교 관리에 대한 반대 캠페인과 폭력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딤미는 여전히 열등한 존재로 남아 있었고, 무슬림 법정에서 증언할 수 없었으며, 결혼과 복장, 탈것, 예배 장소 등에서 여러 제약을 받았다.
딤미가 부를 축적하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음모를 꾸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로 인해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제약들은 항상 엄격하게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법적인 제재의 가능성은 상존했다.
비무슬림 엘리트는 소수 민족으로서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경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통치자의 의지에 따라 일부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중요한 관료직에 오르기도 했으며, 이집트의 파티마, 아유비, 맘루크 왕조에서는 기독교 관리들이 재정 분야에서 활약했다. 유대인들은 의학 분야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며, 궁정 의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개종한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은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어 재상의 지위에 오르기도 했고, 이슬람 사회의 국제 교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슬람 사회에서의 관용은 제한적이었으며, 기독교인들은 새 교회를 지을 수 없고, 공개적인 종교 행사를 할 수 없는 제약을 받았다. 역사적으로 그라나다의 유대인 대학살이나 기독교인들의 노예화 등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딤미 제도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이슬람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였고, 이는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 제도로 발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