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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역사 39편 화폐의 발달 과정 서양 중세사1

by cellife 2024.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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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등장 서양 중세사1

 

바이킹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마도 강철 투구에 뿔 두 개가 달린 모습일 것이다. 험악한 얼굴과 함께 수북한 지저분한 수염, 그리고 황소도 제압할 듯한 근육질의 체격을 지닌 이들이 거대한 양날도끼를 움켜잡고, 반경 1㎞ 너머로 울려 퍼질 듯한 기운찬 함성을 지르며 끊임없이 약탈하고 살육을 저지르는 모습이 연상된다. 서구 역사에서 '바이킹 시대(800~1050년)는 공포와 야만의 시기로 여겨지며, 많은 서구인들은 이들을 수도원을 약탈한 금발의 야만인으로 기억한다. 바이킹의 위세는 실로 대단했다. 793년에는 잉글랜드의 린디스판섬을 초토화시켰고, 영국 제도의 여러 섬들도 그들의 손에 쑥밭이 되었다. 유럽 본토인 파리나 아헨 등도 잇달아 습격당했으며,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까지도 그들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바이킹은 단순한 잔인한 침탈자만은 아니었다. 그들 또한 인간으로서 나름의 체계를 갖춘 찬란한 문명인이었다. 최근 출간된 '바다의 늑대 바이킹의 역사'는 오랫동안 지속된 바이킹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해체하고 그 이면을 되짚어보는 책이다. 바이킹은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대서양을 배경으로 이동하고 정착한 노마드였다. 중부 유럽의 사람들은 북구에서 온 이 낯선 이들이 자신들의 세계에 들어와 다른 언어와 가치관으로 살인과 약탈을 저지르며 그들의 기반을 흔들자, 이들을 야만족으로 불렀다.

 

 

바이킹 특징

바이킹은 원래 알타이 지역에서 시작하여 약 3500년 전 우랄 지방에서 이동해 온 핀우그르어족으로, 자신들을 '삼' 또는 '사아미'라고 부르던 랩족과 결합된 게르만족이다. 로마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이들을 페니라 불렀으며, 이는 켈트어로 '바다의 전사' 또는 '모험하러 가다'는 의미를 지닌다.  바이킹이 유럽에서 가장 위생과 외모를 중시한 민족임을 보여준다. 그들의 거주지에서 발견된 빗, 족집게, 수염 칼, 귀이개 등 개인위생 도구들은 그들이 철저한 위생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심지어 비누를 만들어 목욕과 세신을 즐겼다. 당시 유럽의 대다수 민족이 일 년에 한 번도 목욕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할 때, 바이킹의 위생 습관은 거의 결벽에 가까웠다. 실상 야만족이라 불린 것은 당시 유럽인들이었던 셈이다.

 

게르만족 중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를 원주지로 하는 북 게르만족을 노르만족이라고 하며, 이들은 바이킹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킹'이라는 용어는 '작은 만'을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 'vik'와 '거주자'를 의미하는 접미사 'ingr'가 결합된 것으로, '협만의 거주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북유럽인종으로, 금발과 파란 눈, 긴 머리, 큰 키가 특징적이다. 수세기 동안 스칸디나비아의 주민들은 목축, 농업,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바이킹의 농경 사회는 중요하게 여겨져야  남자들은 바다로 나가고, 나머지 가족들은 농사를 지으며 대가족을 꾸렸다. 바이킹은 정주와 이동을 병행하는 복합적인 노마드 생활을 했다.

 


바이킹 영업 방식

유럽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기를 이야기할 때, 바이킹의 이동과 그들이 남긴 유산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바이킹은 로마 제국의 쇠퇴 이후 수세기 동안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며 중세 이후 유럽 세계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의 대양 항해는 과학적 원리에 기반해 가능했다. 바이킹은 바람에 따라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돛을 발명했으며, 이는 서기 700년경에 개발되어 그들의 항해 방식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러한 진보된 돛 덕분에 바이킹은 바다의 정복자가 될 수 있었다. 바이킹은 대서양을 항해할 때 파도와 바람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 이들은 태양 위치 표지판, 태양 그림자 판, 그리고 태양석(sunstone)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해의 위치를 파악했다. 특히, 태양석은 구름 속에서도 태양의 방향을 찾는 데 유용했다.

 

이들의 항해 기록은 문자가 없던 시기에 '사가'라는 노래 전승을 통해 전해졌다. 아이슬란드의 '그린란드 사가'와 '붉은 털 에이리크의 사가'에 따르면, 1000년경 비아르니 헤르욜프손이 북아메리카에 도달했으며, 레이프 에이릭손과 토르핀 칼세프니도 빈랜드(Vinland)를 항해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바이킹이 콜럼버스 이전에 북아메리카를 발견했음을 시사한다. 11세기 당시 바이킹의 '사가'는 고대 그리스의 오디세이아와 현대의 해양문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로 평가받고 있다.

 

6세기와 7세기에는 발트해를 따라 교역을 시작했으며, 그 범위는 러시아 내륙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8세기 후반부터는 다른 지역을 침략하는 세력으로 변화하게 된다. 바이킹의 이동 원인에 대해 여러 이론이 있지만, 덴마크인들의 왕권 강화가 주요 원인으로 여겨진다. 덴마크 왕들이 스웨덴과 노르웨이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지방 영주들이 약탈을 시작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셰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잉글랜드를 공격했다. 바이킹의 이동은 처음에는 약탈적이었으나, 점차 정착하여 상업에 참여하고 원주민과 융합하면서 중세 유럽의 형성과 재구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바이킹은 국제 정치 무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덴마크계 바이킹은 프랑크와 잉글랜드로 향해, 롤로가 912년에 샤를 3세에게서 노르망디를 받아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고, 1066년에는 기욤이 영국에 노르만 왕조를 열었다. 노르웨이계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도착하고, 일부는 북아메리카에까지 진출했다. 스웨덴계 바이킹은 러시아에 도착하여 류리크의 지휘 아래 노브고로트 공국을 세우고, 일부는 시칠리아에 왕국을 세웠다.

 

"이 바다의 늑대들에게는 단순한 폭력 이상의 것이 있었다. 그들은 법을 만들었고,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라는 참신한 제도를 잉글랜드에 도입하였다. 1세기에 걸쳐 조선 기술이 혁신을 이루어 해양을 가로지르거나 피오르와 강 상류까지 항해할 수 있는 멋진 용머리 배의 건조로 정점을 이루었다." 역설적으로 바이킹의 습격은 창조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 역사가는 "잡초를 모두 태워버리니 땅이 비옥해져서 다음번 생장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들이 휩쓴 지역에서는 오히려 정치적, 경제적 기반이 더욱 탄탄해졌고, 이전 침탈지의 선진 문화가 새 침탈지에 이식되었다. 이른바 파괴의 역설이었다. 그렇게 아일랜드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서유럽 전반이 새롭게 구축되어 갔으며, 프랑스,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시칠리아 왕국이 그 대표적인 수혜국으로 남았다.

 

 

바이킹 약탈 경제

바이킹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사건은 서기 793년, 잉글랜드 북부의 린디스판 수도원을 습격한 것이다. 이들은 동이 트기도 전에 신속하게 상륙하여 부유한 마을과 교회, 수도원을 약탈한 후, 조직적인 반격이 이루어지기 전에 빠르게 사라지는 전략을 사용했다. 바이킹의 전통적인 구술인 ‘사가’는 “아무리 강력한 육군이라도 육지에서 싸우지 않는 한 해군력에 비해 열세임을 바이킹이 역사적으로 처음으로 증명했다”고 전한다. 그들은 수면에 깊이 잠기지 않는 대형 보트를 이용해 바다에서 강으로 신속하고 은밀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린디스판 습격은 이후 기록에서 “불을 뿜는 용이 하늘을 날았다”는 묘사와 함께, ‘야만인’들이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여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전해졌다. 845년에는 파리를 공격하여 6t의 금과 은을 약탈하고, 귀족과 성직자를 사로잡아 몸값을 요구했으며, 투르와 오를레앙을 초토화시키고 샤르트르를 점령하는 등 유럽 전역에 공포를 퍼뜨렸다.

 

바이킹은 적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침략을 멈추는 대신 거액의 세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는 사라센 해적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아군의 소모를 피하면서 목적을 달성하는 전략으로 그들의 냉철함과 경험을 드러낸다. 전투를 준비할 때는 척후병을 보내 적의 상황을 정찰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상황에 따라 다양한 작전을 펼치는 유목민적 특성을 보였다. 이들은 고정된 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동하며 생활하는 노마드 정신으로 무장하여 정주민인 유럽인들에게는 대항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마을과 농민, 상단을 약탈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단계부터는 국가와 전쟁 중일 수 있어 실수하면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따라서 브리튼 문화권의 약한 세력이나 서로 싸우는 아일랜드의 파벌들을 대상으로 재산을 모으는 것이 좋다. 세력이 커지면 작은 성 하나쯤은 함락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겠지만, 경제적으로는 방어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단순히 약탈하고 불태우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 결과 독일, 프랑스, 영국의 해안과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북쪽 바다에서 온 낯선 해양인들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아야 했다. 금은보화를 약탈당한 유럽의 교회와 수도원, 왕실은 이들을 ‘야만스런 이교도 해적’으로 기록하며, 철로 된 뿔 달린 투구를 쓴 공포의 인물로 묘사했다. 하지만 실제로 바이킹의 투구에는 수소의 뿔이 달려 있지 않았으며, 유적 조사에서도 뿔이 달린 투구는 매우 드물게 발견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눈이나 얼굴을 덮는 가면 모양의 투구를 사용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거지를 마련하고 싶다면 성을 확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다른 나라의 봉신으로 들어가는 것도 고려해보아야 한다. 전쟁 상태가 아닌 나라들에 들어가면 한 번 정도는 위기를 피할 수 있다. 포로를 잡아 팔아넘겨 노예 장사를 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그러나 영주가 약탈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한다. 만약 그들을 은신처에 가둬두었다가 탈출하게 되면, 그들은 은신처로 군대를 끌고 와서 복수하려 할 것이다. 이렇게 악명이 쌓이면 무법자들을 흡수하거나 그들과 거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이 경우에는 물건을 원가로 판매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된다.

 

대서양으로 나간 바이킹들은 교회와 왕, 부자들의 보물을 약탈해 재분배함으로써 중세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무역에도 힘을 쏟아 점령지에 통상망과 상품 유통 조직을 구축하였고, 말, 모피, 가죽, 목재, 무기 등을 거래하며 동서간 교역, 특히 노예 매매의 중개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북유럽의 도시 발달을 가속화하고, 나중에 한자도시로 발전할 기반을 마련했다. 바이킹은 아프리카 연안에서 근동, 아이슬란드에서 에스파냐까지 교역의 중심에 있었으며, 물류 상인으로서 다양한 물품의 운송과 유통을 장악했다. 그들은 정복한 땅에 스칸디나비아식 이름을 남겼고, 러시아라는 이름도 이들로부터 유래했다.

 

 

바이킹 이후

8세기부터 11세기까지 바이킹은 유럽 대륙에 식민지를 세우고,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서 레이프 에릭손이 이끄는 배가 아메리카를 항해하며, 동방의 비단과 은을 찾아 이슬람권까지 진출했다. 이로써 바이킹은 세계적 규모로 교역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성과는 조선과 항해라는 독창적인 기술, 보트 중심의 슬림화된 조직, 목숨을 걸고 모험하는 정신, 그리고 유연한 적응력 덕분이었다. 바이킹 정신을 바탕으로 한 스칸디나비아계 기업들은 거대한 자본이나 조직력에 의존하기보다는 독자적인 기술과 지혜를 활용하여 최소한의 자본과 조직으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특화된 기술 개발을 중시하며, 철저한 권한 위임을 통해 분사화된 경영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바이킹 하면 흔히 해적이나 노략질을 떠올리기 쉽지만, 13세기 스웨덴의 바이킹 상인 행동 규범은 이를 단호히 반대한다. '바다를 항해할 때는 대담하고 힘차게 나아가야 하지만, 뭍에 올라 도시로 들어가서는 예의 바르고 점잖게 행동해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사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한다.

 

이처럼 변방에 위치하고 자원 부족에 시달리며 지배나 억압을 싫어하는 민족적 기질은 스칸디나비아계 기업들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이들로부터 우리는 우리 경제의 돌파구를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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