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역사 36편 서양 고대사14 2차 포에니 전쟁
1차 포에니 전쟁은 주로 시칠리아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로마는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지중해의 제해권을 확보했다. 기원전 241년 전쟁이 끝났을 때 로마는 해전 능력을 빠르게 학습한 민족으로 성장했다. 23년 후 시작된 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에 의해 이끌어졌다. 전쟁은 한니발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그가 이탈리아에 이끌고 온 병력은 2만 6천명이었지만, 로마 연합의 병력은 88만명에 달했다. 한니발은 15년간 이탈리아 전역을 휘저었지만 로마를 정복하지 못했다.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는 카르타고의 장군으로, 튀니스에서 북 아프리카를 장악했다. 그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패한 후, 아들 한니발에게 평생 로마와 싸울 것을 맹세시켰다. 한니발은 아홉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스페인으로 가서 카르타고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기원전 229년, 아버지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한니발은 로마의 동맹 도시 사군토를 공격했다. 로마의 선전포고 후, 그는 대군을 모아 카르타헤나에서 출정하였다. 하지만 지중해의 제해권을 잃은 상태에서 배를 이용할 수 없었기에, 한니발은 군대를 이끌고 육로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군사들은 출발 당시 장군의 계획을 알지 못했으며, 만약 알았다면 따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니발의 행군은 치명적이었다. 카르타헤나를 출발할 때 그의 군대는 10만명이었지만, 피레네 산맥과 론강을 지나면서 병력은 4만 6천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는 해안가를 포기하고 알프스를 우회하여 진입했습니다. 알프스를 넘어 튜린으로 진입했을 때, 로마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누구도 눈 덮인 알프스를 넘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니발과 함께한 2만 6천명의 병력 중 많은 이가 사망했지만, 그의 성공은 로마에게 두려움을 안겼다.
첫 전투 전, 한니발은 병사들에게 로마의 장군과 비교할 수 없음을 강조하며 승리를 다짐했다. 그는 전투가 끝난 후 보상과 시민권을 약속하며 병사들을 격려했습니다. 이제 로마의 88만명 병력과 맞서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로마인들은 한니발의 군대가 무적이라는 사실에 공포를 느꼈다. 첫 전투인 트레비아 전투에서 로마군 4만명 중 5천명만 살아 돌아왔고,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에서도 2만 3천명이 전멸했다. 한니발은 로마 병사만 처형하고 동맹국 병사들은 석방하여 로마 연합을 해체하려 했다. 기원전 216년, 로마는 칸나이 평원에서 9만명의 대군으로 한니발을 무너뜨리려 했으나, 7만명이 사망하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로마는 계속해서 전투를 시도했지만 한니발에게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로마는 포기하지 않고 지지 않겠다는 전략으로 버티기로 결정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한니발은 불리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카르타고와 스페인으로부터의 지원이 차단되고, 로마 연합의 해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니발의 부대는 이탈리아 남부에 갇히고, 로마군의 봉쇄로 지루한 대치를 이어가고 있었다.
한니발과 스키피오는 북아프리카 자마에서 맞붙어, 한니발의 5만 대군이 스키피오의 4만 대군에 패배하며 전투에서 전멸했다. 패배 후 한니발은 전쟁을 주장하지 않고 카르타고를 대표해 스키피오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주요 조건은 카르타고의 자치 인정, 해외 식민지 포기, 로마 승인 없는 전쟁 금지, 군선 제한 등이었다. 2차 포에니 전쟁은 이렇게 끝났고,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받으며 로마의 영웅이 되었다. 한니발은 해외로 망명했으나 로마 병사들에 의해 잡히기 직전 독배를 마시고 자살하며 그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로마는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집단 지성을 발휘했다. 다양한 의견과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가 공존하며, 패배에도 불구하고 동맹국에 무리한 지원을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희생으로 공백을 메꿨다. 로마는 각 계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합리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내부 붕괴 없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반면, 카르타고는 전투에서 패배한 장수를 처형하는 관습이 있어 지휘관들이 줄어들었다. 로마는 패배한 지휘관에게도 기회를 주어 실전 경험을 쌓게 했고, 현장 지휘관에게 강화교섭권을 부여하는 유연함을 보였다. 이러한 로마의 단결력과 집단지성이 한니발의 이탈리아 원정을 실패로 이끈 주요 원인이었다.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강화조약을 위반해 세 번째 침공을 받았고 결국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현재 튀니지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대 국가로, 고대 로마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놓고 경쟁했던 주요 세력이었다. 카르타고는 소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이로 인해 풍요로운 문화와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로마와의 군사적 차이로 인해 결국 패망하게 되었다. 이 사례는 막대한 재산이 있더라도 안보를 다른 세력에 의존하게 되면 패망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다.
니키아 도시인 티레의 공주 디도는 아버지가 죽은 후 정치적 위협을 느끼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카르타고를 건설했다. 카르타고는 지리적으로 지중해 서부와 동부의 중간에 위치하여, 이로 인해 두 지역 간의 중계무역을 활발히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서부의 광산에서 채굴된 원자재와 동부의 우수한 문화 상품을 교환하며 카르타고는 번영을 누렸고, 이는 고대 국가들 중 가장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전성기에는 카르타고가 북아프리카 해안, 이베리아 반도,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섬 대부분을 세력권에 두고 있었으며,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 끊임없는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결국 카르타고는 고대 로마와의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통해 몰락하게 되었다.
로마가 카르타고를 패배시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카르타고가 주로 용병에 의존한 반면, 고대 로마는 시민군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카르타고의 지배층은 페니키아인으로, 이주민족이었기 때문에 원주민에 비해 숫자가 적었습니다. 이로 인해 카르타고는 자국민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용병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페니키아인으로 구성된 시민군은 본토 방어에 주로 동원되었고, 정복전쟁 등에서는 용병을 사용했다.
카르타고의 지배층은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이 자금을 용병 고용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용병은 지급된 돈이 없으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특성이 있었다. 즉, 재정이 부족해지면 카르타고는 본토 방어조차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반면, 고대 로마는 자발적으로 군에 참여하는 시민군을 중심으로 군사 체제를 구성하였고,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로마를 점령했을 때도 로마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인구부양 농업과 상품작물 농업의 차이는 고대 로마와 카르타고의 패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고대 로마는 농업 국가로서 주로 식량 중심의 농업을 운영했으며, 이는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반면 카르타고는 상업 국가였지만, 완전히 농업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카르타고는 플랜테이션 농업을 통해 주로 상품작물을 재배하여 판매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즉, 카르타고는 인구를 늘리는 대신 '돈'이 되는 농업에 집중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두 국가 간 인구와 생산력에서 뚜렷한 차이가 발생했다. 고대 로마는 식량 자급자족을 통해 인구를 늘릴 수 있었던 반면, 카르타고는 자급자족이 부족했기 때문에 페니키아인의 수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이 결국 고대 로마와 카르타고의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어냈다.
로마 제국 기축통화
로마 역사 대부분에 걸쳐 고대 로마의 화폐는 금, 은, 청동, 오리칼쿰, 구리 주화로 구성되었다. 기원전 3세기 공화정 시기에 화폐가 도입된 이후부터 제정 시대에 이르기까지, 로마 화폐는 형태와 명칭, 구성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가치 하락과 주화의 대체는 변하지 않는 특징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화폐 개혁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비잔티움 시대에도 이어졌다.
로마의 경제력과 오랜 지속성 덕분에 로마 화폐는 고대부터 중세까지 유라시아 서부와 북아프리카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중세와 현대의 이슬람 왕조 국가와 유럽 국가들의 화폐 모델로 자리 잡았다. 또한, 로마의 화폐 명칭은 현재에도 많은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랍권의 '디나르'는 데나리우스에서 유래하였고, 영국의 '파운드'와 멕시코의 '페소'는 로마의 리브라의 번역으로 볼 수 있다
서구 문화의 기초를 형성한 고대 로마는 대항해 시대에 해상 패권을 쥔 국가들 사이에서 은화가 주요 기축 통화로 사용되었다. 전성기 로마 제국의 은화는 거의 순도 100%에 가까웠다. 그러나 제국의 영토가 확장되고 재정 적자가 심화되자, 로마는 대량으로 주화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손쉬운 해결책으로 은의 순도를 낮추게 되었다. 네로 황제 시절에는 은화의 순도가 89%로 떨어졌고, 카라칼라 황제 시기에는 50% 이하로 급격히 하락했다. 화폐의 신뢰도가 무너지자 물가가 급등하고, 결국 민심을 잃은 로마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사례는 금융이 문명의 흥망성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인구부양 농업과 상품작물 농업의 차이는 고대 로마와 카르타고의 패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고대 로마는 농업 국가로서 주로 식량 중심의 농업을 운영했으며, 이는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반면 카르타고는 상업 국가였지만, 완전히 농업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카르타고는 플랜테이션 농업을 통해 주로 상품작물을 재배하여 판매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즉, 카르타고는 인구를 늘리는 대신 '돈'이 되는 농업에 집중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두 국가 간 인구와 생산력에서 뚜렷한 차이가 발생했다. 고대 로마는 식량 자급자족을 통해 인구를 늘릴 수 있었던 반면, 카르타고는 자급자족이 부족했기 때문에 페니키아인의 수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이 결국 고대 로마와 카르타고의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어냈다.
카르타고 경제 금융만 키운 결과 멸망
전성기에는 카르타고가 북아프리카 해안, 이베리아 반도,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섬 대부분을 세력권에 두고 있었으며,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 끊임없는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결국 카르타고는 고대 로마와의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통해 몰락하게 되었다.
니키아 도시인 티레의 공주 디도는 아버지가 죽은 후 정치적 위협을 느끼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카르타고를 건설했다. 카르타고는 지리적으로 지중해 서부와 동부의 중간에 위치하여, 이로 인해 두 지역 간의 중계무역을 활발히 진행할 수 있었다. 서부의 광산에서 채굴된 원자재와 동부의 우수한 문화 상품을 교환하며 카르타고는 번영을 누렸고, 이는 고대 국가들 중 가장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카르타고의 지배층은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이 자금을 용병 고용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용병은 지급된 돈이 없으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특성이 있었다. 즉, 재정이 부족해지면 카르타고는 본토 방어조차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반면, 고대 로마는 자발적으로 군에 참여하는 시민군을 중심으로 군사 체제를 구성하였고,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로마를 점령했을 때도 로마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는 현재 튀니지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대 국가로, 고대 로마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놓고 경쟁했던 주요 세력이었다. 카르타고는 소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이로 인해 풍요로운 문화와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로마와의 군사적 차이로 인해 결국 패망하게 되었다. 이 사례는 막대한 재산이 있더라도 안보를 다른 세력에 의존하게 되면 패망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다.
로마가 카르타고를 패배시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카르타고가 주로 용병에 의존한 반면, 고대 로마는 시민군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카르타고의 지배층은 페니키아인으로, 이주민족이었기 때문에 원주민에 비해 숫자가 적었다. 이로 인해 카르타고는 자국민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용병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페니키아인으로 구성된 시민군은 본토 방어에 주로 동원되었고, 정복전쟁 등에서는 용병을 사용했다.